선명한 색채 대비로 드러낸 파토스와 인간성 구원에 대한 고찰

 

 

깊은 야산, 흉기로 무장한 여인과 사람들이 있다.

그는 13년간 복수만을 꿈꾸어왔다. 함박눈이 쌓인 야산은 온통 하얗다.

. . .

야산이 붉게 물들고 그토록 기다려온 복수가 끝났다. 그런데 개운치가 않다.

뜨거워야 할 복수자들은 차갑고 이해타산적이다.

복수를 향해 속도감 있게 질주하던 주인공은

목적지에 도달한 후 속죄도, 구원도 받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한다.

 

 

금자는 세상에도, 딸 제니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 카메라는 시종 금자의 옆모습만을 드러낸다. 금자는 과연 정면을 바라볼 수 있을까.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의 옆얼굴에 관한 이야기다. 금자는 유괴범에 의해 미국으로 수양 간 딸 제니와 다른 피해 아동의 한을 달래어보겠노라 복수극에 대한 명분을 세운다. 하지만 끝내 복수 그 자체에 매몰되어버린 그는 딸 제니 앞에 당당할 수 없고 그렇기에 금자는 딸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다. 카메라는 제니를 마주한 금자의 옆얼굴을 집중적으로 잡아내고 금자는 속죄의식을 떨친 연후에야 비로소 제니를 바로 마주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 시리즈를 엮어내며 복수에 매몰된 사람의 광기와 강박, 그리고 속죄의식과 구원에 대해 고찰했다. 복수 첫 부작인 <올드 보이>가 레고게임이라면 복수 2부작인 <친절한 금자 씨>는 퍼즐게임이다. 전자가 답을 보여주지 않은 채 긴밀한 추론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임이라면 후자는 치열한 모의 끝에 설계한 서스펜스를 관객이 맞힐 수 있도록 힌트의 범주를 좁혀가는 게임이다. 

   <친절한 금자 씨>는 강렬한 색상배치와 집중력 있는 전개를 통해 시종 파토스pathos적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플롯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끝까지 차가운 시선을 유지해 감정의 임계를 절묘하게 지켜냈다. 영상이 겨누는 칼끝은 단순한 광기의 폭발에 괄호를 치고 인간 삶에 대한 속죄의식과 구원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금자는 사건 이후 13년을 복수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감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에피소드가 진행되며 금자의 의지대로 줄거리가 착착 진행되지만, 영화가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의 요소를 서사에서 철저하게 배제했기 때문이다. 복수에 가담할 인물 캐스팅부터 이후 진행되는 사건들은 모두 복수를 유념한 금자가 치열한 모의 끝에 설계한 틀 내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각기 분절된 에피소드와 인물은 사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은 철저히 인과에 따라 복수극을 변주해간다.

 

박찬욱 감독은 흰색과 적색을 대비, 조화시키며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분위기를 형성하는 테마는 바로 색상이다. 박찬욱 감독은 흰색과 적색을 절묘하게 대치했는데 이 두 가지 색을 보색 관계가 아니라 협동 관계로 활용했다. 영화에서 적색은 금자의 파토스를 강렬하게 분출하는 색으로 일원적인 의미로 사용된 반면 흰색은 적색과 대척점에 있는 맑음, 순수를 뜻하는 동시에 복수가 자행되는 잔혹한 공간으로써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극 중반까지는 적색이 영상을 지배한다. 금자가 기거하던 감방(창살까지도)과 출소 후 지낸 모텔방과 복수의 시간을 재는 촛대까지도 빨간색이다. 감방은 본디 자유를 겁박당한 채 죄의 대가를 치르며 갱생을 다짐하는 공간이지만, 금자는 적색으로 치장된 이 공간에서 오히려 흉악범들과 연을 맺으며 복수 청사진을 그려낸다. 지은 죄가 없기에 치를 대가도 없으며 그에게 갱생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엄마(금자)에게 복수를 꿈꾸던 제니 역시 빨간 편지지에 영문으로 된 편지를 썼다. 하얀 눈이 덮인 야산에서 백 선생을 죽인 후 선혈을 처리한 금자는 모종의 의식을 훌륭하게 마쳐낸 양 눈가의 빨간 아이섀도를 지우며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하얀 두부를 내친 후 선글라스에 빨간 힐을 신고 활보하는 금자가 용인한 사회적 호칭은 오로지 금자 씨뿐이었다. 금자는 출소 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빵집 알바에게 누나가 아닌 금자 씨라 부르라며 관계의 선을 긋는다. 곡절 끝에 만난 딸 제니에게도 똑같은 호칭을 요구했다는 것은 영화의 전개에 있어 흥미롭게 보아야 할 대목이다.

   딸의 복수를 위해 13년을 살아왔을 만큼 금자에게 은 눈에 밟히는 대상이다. 그런데 복수를 눈앞에 둔 시점에 그가 딸과의 관계마저 거부해버린 것이다. 결국, 금자는 본질을 잊은 채 자기최면에 걸린 채 복수를 자행하고 집착에서 벗어난 연후에 허망함과 원죄의식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너나 잘하세요" 금자는 친절하지 않다. 반어를 활용한 제목이 극에 흥미를 더한다.

   금자가 겨눈 칼끝은 결국 군중의 광기와 강박, 그리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도취 된 현대인의 정서였다. 극 초반 관객들은 반복적인 플래시 백과 속도감 있는 전개를 따라가며 케이퍼 무비의 장르적 재미를 좇게 된다. 통렬한 복수극을 기대하며 중반부에 다다른 관객들은 참혹한 자식의 죽음 앞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유족들을 만나며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통렬한 보복을 자행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유족들은 자본 논리에 따라 차분하고도 이성적으로 저마다 복수 의식에 동참한다. 복수에 필요성을 느끼지만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어 한 번 빵에서 살다 나왔으니 덜 부담스럽지 않느냐며 금자에게 칼자루를 넘기는 모습, 복수 후 자식 유괴될 때 떼인 돈을 돌려달라며 금자에게 계좌번호를 적어 넘기는 모습에서 관객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더이상 영화를 장르적으로 즐길 수 없게 된다.

   한편, 유족들은 광기 앞에서도 차가운 면을 보이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지난 아픔은 애써 묻어두고 또다시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적 존재이기도 했다. 백 선생의 유해와 선혈을 청소한 유족들은 꼭 자식 생일 같다며 지나간 일은 묻고 내일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현실적인 주체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저마다의 아픔을 마음 한구석에 묻은 채 무덤덤한 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오마주되는 것이다.

 

 

흰색을 부정한 금자는 결국 흰 옷을 입은 제니로부터 구원받는다

  눈물은 감정을 씻어내리는 비다. 출소 후 흰 두부를 내치며 너나 잘하세요.’라며 집중력 있게 서사를 훑어 내려간 금자는 결국 두부로 만든 흰 케이크에 머리를 박고 오열한다. 세간의 오해를 받아 희대의 유괴살인마로 대서특필 될 때도, 미국에서 제니를 만났을 때도, 백 선생을 잡아 서서히 참수해갈 때도 한결같이 차갑기만 했던 금자가 극 중에서 처음으로 꺼억꺼억 눈물을 토해낸다. 자기최면이 풀린 것이다. 복수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리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훑고 온 금자가 결국 인간성을 깨닫고 속죄를 구하는 것이다.
 
이때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제니가 하얀 눈발이 날리는 골목길에 맨발로 나와 까치발로 오열하는 금자를 살포시 안는다함박눈이 야산과 폐교를 온통 하얗게 물들이던 공간에서 선혈 낭자한 복수를 자행한 금자는 흰 눈이 쌓이는 골목에서 흰 케이크에 머리를 박고 하얀 옷을 입은 제니로부터 구원받았다. 그제야 금자의 자기최면이 풀리면서 복수극은 비로소 막을 내린다. 딸로부터 구원받은 금자는 사회적인 소통을 시작할 것이다. 흰색의 수미상관은 끝이 곧 시작이라는 의미로 쓰인 장치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아니라 작은 불씨로써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 대중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평론가 지망생입니다.

위 영화에 대해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소통해주십시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